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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수수 꽃다리 2013. 6. 5. 12:54

 

 

 

 

 

소금에 인생의 맛을 비유했다.

달고 시고 쓰고 짠 인생의 맛이 그런 거지

, 사랑하는 나의 당신 달고 시고 쓰고 짜다

달고 시고 쓰고 짜다 나는야 노래하는 사람

당신의 깊이를 잴 수 없네. 햇빛처럼 영원처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폐결핵에 걸려 귀국했을 때 큰애는 초등학생, 둘째 애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막내 시우만 어린애였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선지 아이들과도 서먹서먹했다.

그가 안아주기라도 하려 하면 마치 낯선 남자를 대하듯이 매몰차게 뿌리치고

제 엄마 품으로 달려가곤 하는 걸 보면서 그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걸 알고 느꼈다.

 

애들한테 사우디에서의 5년이란 너무 긴 세월이었던 것 같았다.

아이들을 위해 멀고 먼 사막에서 죽어라고 일했다는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를 계속 그들에게 소속되지 않은 손님 보듯 할 뿐이었다.

 

혜란 과 그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인지, 그런 건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결정권을 전적으로 어미가 갖고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이들과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큰애는 중학교 갈 때까지도 그를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다정한 부녀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한 적도 많았다.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개선은 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아내한테 너무 결정권을 위임하고 있었던 것이 아버지로서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혜란 과의 관계도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렸을 때 사랑받아온 방식대로 애들을 사랑했고, 또 그런 방식대로 살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외동딸로 성장해온 그녀였으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커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았다.

어떤 보상 심리도 작용했을 터였다.

자신이 가난해진 걸 주위 사람한테 들키는 것이 그녀로서는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평생 플러스 통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사우디에서 5년 만에 돌아왔을 때, 통장에 잔고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는 정말 놀랐다.

고생한 만큼 월급도 그 시절로서는 꽤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그에게 보여준 아내의 통장은 마이너스였다.

아파트로 이사해 있었지만 그건 망하기 전의 친정 오빠들이 도와 그리된 것이었지 그가 번 돈으로 구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최고의 사립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부잣집 외동딸이었을 때의 수준으로 옷을 입었고, 아이들도 그 수준에 맞추어 꾸며졌다.

명품이 아니면 확용 품도 쓰지 않을 정도였다.

혜란 은 자본의 단맛을 평생 버리지 못한 환자였다.

 

그녀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단단히 맞설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마음의 빚은 언제나 그의 가슴속에 세희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소비의 단맛을 쫓는 그녀에게 강력히 제동을 걸지 못한 내적 동인이었다.

죽어라 일했지만 가족들의 소비를 따라가기엔 항사 부족했다.

남의 밥그릇에 그 역시 나름대로 빨대를 박았던 적도 많았다.

 

거래처로부터 리베이트를 눈치껏 받아 챙기기도 했고, 여러 수단을 동원해 거래처에게 밑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자신을 위해선 정작 자장면조차 변변히 못 사 먹을 정도로 짜게 굴면서도 그랬다.

점심 약속이 없을 때는, 부하직원들이 볼까 봐 먼 시장 뒷골목까지 가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 적도 많았다.

상무가 된 다음에도 그랬다. 그는 극빈자 신세를 평생 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짠 맛 - 가출

막내딸이 성년을 맞이한 생일 날 집으로 요리사를 부르고 파티를 하던 날

아버지 선 명우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했다.

 

신맛 - 첫사랑

 

쓴맛 - 인생

 

단맛 - 신세계

 

사람살이가 그 자체로 강물이 될 수 있다면 불안과 번뇌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최소한 솜털처럼 부드러워질 것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비가 내리면 빗물을 품어 내 살로 만들고 장애가 있으면 가만히 스며들거나 고요히 쓰다듬어 넘어가면 되었다.

흐른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랑이겠지만, 제 자신을 버리고 욕망에 따라 떠도는 부랑은 아니었다.

가출한 선 명우는 떠돌이가 되었다.

 

불안한 부랑자가 아니라 언제나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진짜 유랑인의 삶으로 바뀐 셈이었다.

그는 바람과 시간에 떠밀려 흐르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고 흘러 다녔다.

췌장암도 잊어버리고 처자식도 잊었다.

 

가진 게 있으면 먹고 쓸쓸할 때면 쓸쓸한 사람들 손을 잡았으며, 기분이 아늑해지면 구부리고 잠들었다.

진실로 유장한 시간의 강을 따라 자신이 가벼이 흐르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삶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체제의 정교하고 잔인한 프로그램에서 놓여난 삶이었다.

그런 삶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으므로, 자신 살아 있는지 죽은 다음의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때로는 애매모호했다.

자신 하나의 자연이라는 시실을 길 위에서 하루가 다르게 알아차리는 과정이었다.

 

 

 

<소금>은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취할 수 있는 소설 문법에서 비켜나 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소금>이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근원적인 화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아버지1 아버지2 혹은 아버지10의 이야기다.

늙어가는 아버지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붙박이 유랑인 이었던 자신의 자난 삶에 자조의 심정을 가질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시작한 소설인데, 정작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까 봐 걱정되는 대목이 많은 것이 딜레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 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빨대와 깔대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기러기 아빠들…….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

일주일 동안 나는 이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